도축장 앞을 메운 시위대와 뉴욕증시를 뒤흔든 까마귀들의 내부자 거래 폭로까지, 세상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계가 망하기엔 인간과 동물의 적응력이 모두 지나치게 빨랐다. 대혼란의 폭풍이 한 꺼풀 꺾인 지금, 도시는 이상하고 기묘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골목길 어둠 속에서 시작된 기묘한 거래
민수는 어두운 빌라 골목길 전신주 밑에 서서 스마트폰에 연결된 귀걸이형 번역 수신기를 고쳐 매었다. 주머니 속에서 가느다랗고 무뚝뚝한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른쪽 카니발 밑이다. 캔 따는 소리가 너무 작아서 하마터면 그냥 잘 뻔했잖아.”
차체 밑 어둠 속에서 노란 얼룩무늬 길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에는 닥터 두리 전용 초소형 번역 펜던트가 딸깍거리며 붉은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민수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프리미엄 연어 캔을 내려놓았다.
“노랑아, 번역기 마이크 볼륨 좀 줄여. 약속대로 가져왔으니까 빨리 말해. 요즘 이 동네 택배 상자 자꾸 사라지는 거, 네가 범인 봤다며?”
노랑이는 캔으로 코를 가져가 끈덕지게 냄새를 맡더니, 왼쪽 윗입술을 슬쩍 올렸다.
“매일 새벽 3시 반, 모자 쓴 인간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 현관문 앞에 쌓인 박스 중에서 제일 크고 가벼운 것만 골라 가방에 넣더라고. 신발 밑창에 빨간색 로고가 그려진 놈이야. 편의점 옆 쓰레기통 옆에서 담배를 피우지.”
“오토바이 번호판은?”
“내가 무슨 블랙박스냐? 정보 값은 이걸로 충분해. 내일부터는 저 삼거리 점박이 패거리한테 우리 영역 안 넘어오게 네가 경고판이라도 세워줘. 안 그러면 다음번 사건은 안 물어다 준다.”
노랑이는 캔 사료를 핥아먹으며 민수를 노려보았다. 한 달 전만 해도 쓰레기봉투를 뒤지며 인간을 경계하던 길고양이가, 이제는 번역기를 매고 정보의 대가로 자신의 생존 영역을 보장받는 법을 터득해 버린 것이다.
[긴급 속보] 법원, 동물의 증언을 보조 증거로 인정할 것인가
점심시간, 식당 모니터에서는 연일 새로운 사회적 진통을 다루는 뉴스가 송출되고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는 한 달 전의 패닉에서 벗어나 훨씬 침착하지만 복잡한 어조를 띠고 있었다.
“‘닥터 두리 2.0’ 사태 한 달,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운 법적 가이드라인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법원은 오늘, 닥터 두리 번역기를 통해 전달된 동물의 진술을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두고 첫 판단에 들어갔습니다. 피의자의 인권과 동물의 진술 신뢰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민수는 뉴스를 보며 식은 찌개를 삼켰다. 노랑이가 준 힌트를 바탕으로 편의점 CCTV를 뒤져 택배 도둑의 빌라를 알아냈지만, 진짜 난관은 바로 그 취조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범인이 맞습니다! 제 제보자인 길고양이 노랑이가 번역기를 통해 신발 밑창의 특이점과 행동 패턴을 정확히 증언했습니다!”
민수가 경찰서 취조실에서 흥분해서 소리쳤지만, 맞은편 형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김 형사님, 방금 뉴스 못 봤어요? 지금 닥터 두리 번역 데이터를 정식 증거로 채택할 수 있냐 없냐로 대법원에서 싸움 난 거? 피의자가 ‘고양이 번역기 오류나 환각이다’라고 우기면 끝이라고요!”
취조실 의자에 느긋하게 기댄 피의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형사님, 요즘 고양이들 캔 사료 얻어먹으려고 아무 사람이나 찍어서 소설 쓰는 거 모르십니까? AI 번역기 오류라고요!”
열린 창문 너머에서 나타난 뜻밖의 증인
그때, 경찰서 열린 창문 틀에 앉아 있던 비둘기 한 마리의 목 펜던트에서 매서운 번역음이 쏘아붙이듯 흘러나왔다. “거짓말 마, 이 빨간 운동화야! 너 어제 새벽 3시 40분에 내 머리 위로 택배 박스 던져서 나 날개 맞을 뻔했잖아! 내가 너 얼굴 똑똑히 기억해!”
취조실 안에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비둘기는 목을 뻐근하게 밀어내며 덧붙였다.
“그리고 너 아까 경찰서 들어올 때 주머니에서 까만 테이프 슬쩍 빼서 저쪽 쓰레기통 뒤에 버렸지? 내가 다 봤어!”
피의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고, 형사는 곧바로 쓰레기통 뒤에서 범행에 사용된 증거물을 확보했다. “AI 번역기를 통해 전달된 비둘기의 구체적인 증언으로, 사건은 피의자의 자백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뉴스에서 거론되던 ‘동물 증언의 법적 효력’이 민수의 눈앞에서 실제 사건을 해결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도달한 시끄럽고 다정한 새로운 평화
경찰서를 나온 민수는 밤공기를 깊게 마셨다. 한 달 전 대혼란은 파국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간은 적응했고, 동물들 역시 이 소통 방식을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는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민수가 빌라 단지 화단 앞에 서서 약속했던 ‘길고양이 노랑이 영역,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마시오.’ 표지판을 땅에 꾹꾹 눌러 박을 때였다. 건너편 삼거리에서 점박이 길고양이 패거리가 다가왔지만, 민수가 세운 표지판과 그 옆에 당당하게 서 있는 노랑이를 보더니 머뭇거리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번역기와 표지판이 만든 규칙이 비로소 인간과 동물 사이에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어깨 위에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까 경찰서에서 증언했던 비둘기였다.
“이봐, 표지판 세워줬으니까 아까 그 오토바이 놈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동전 위치 알려줄게. 옥수수 알갱이 한 주먹이면 돼.”
민수는 허탈하게 웃으며 주머니 속 옥수수 통조림을 꺼냈다. 주변을 둘러보자, 전신주 위에서는 참새들이 번역기를 통해 내일의 날씨와 바람의 방향을 나누고 있었고, 벤치에서는 강아지가 주인의 우울한 얼굴을 문지르며 나지막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민수는 창문을 닫으려다 말고 골목을 내려다봤다. 담벼락 위에는 노랑이가 앉아 있었고, 전봇대 위에는 아까 그 비둘기가 있었다.
“내일도 연어캔 가져와.” 노랑이가 말했다.
민수는 피식 웃었다. “너희들, 이제 진짜 사람 다 됐네.”
그러자 비둘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이 된 건 너희 쪽 아니야?”
민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골목에는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동네 게시판에는 새로운 안내문 하나가 붙어 있었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사는 골목을 위한 첫 번째 약속〉
누가 먼저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완벽한 유토피아도, 끔찍한 디스토피아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은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민수는 비둘기에게 옥수수 알갱이를 내어주며, 수백만 년 동안 이 행성에서 함께 살아왔지만 이제야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도시의 시끄럽고도 다정한 밤길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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